사진제공: 페어팩스 카운티 경찰국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헬스장에서 일면식도 없는 한인 남성에게 총격을 가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40대 한인 남성이 정신질환에 따른 심신상실을 인정받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고인이 형사처벌 대신 정신보건 당국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되면서 어린 자녀를 남기고 숨진 피해자의 유족은 “불공정한 결과”라며 충격과 허탈감을 드러냈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순회법원은 지난 7월 17일 스티브 태희 하(사진.Steve Taehee Ha·45·한국명 하태희)씨에게 적용된 2급 살인과 중범죄 수행 중 총기 사용 혐의에 대해 ‘정신이상에 따른 무죄’(Not Guilty by Reason of Insanity)를 인정했다.
마이클 F. 디바인 판사는 하씨가 범행 당시 법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정신상태에 있었다는 평가를 받아들였다.
하씨는 앞서 법적으로 정신이상 상태였다는 판단을 받은 뒤 배심원 재판을 받을 권리를 포기했다. 이에 따라 사건은 배심원 평결이 아닌 판사의 심리로 진행됐으며, 법원은 하씨를 버지니아주 행동보건·발달서비스국 책임자의 보호 아래 인계하도록 명령했다.
이번 판결에서 사용된 ‘무죄’는 총격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하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법원이 하씨의 행위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범행 당시 중대한 정신질환 때문에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무죄 판결처럼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료시설 입원이나 조건부 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별도의 절차가 이어진다.
버지니아주법에 따르면 정신이상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정신과 전문의 1명과 임상심리학자 1명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평가진은 당사자에게 현재 정신질환이 있는지, 입원 치료가 필요한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당한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지, 외래 치료와 감독만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등을 조사해 법원에 보고한다.
법원은 평가 결과를 토대로 하씨를 정신의료시설에 계속 입원시킬지, 엄격한 치료·감독 조건을 붙여 지역사회로 복귀시킬지, 또는 조건 없이 석방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다만 조건부 석방은 적절한 외래 치료와 감독이 가능하고 당사자가 조건을 준수할 가능성이 크며 공공안전에 과도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만 허용된다.
하씨에 대한 최종 처분 심리는 오는 9월 17일 열릴 예정이다. 현 단계에서는 하씨가 석방되는 것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며, 정신과 전문의와 임상심리학자의 보고서를 검토한 뒤 디바인 판사가 입원 또는 조건부 석방 여부를 판단한다.
사건은 2024년 8월 20일 오후 1시쯤 버지니아주 레스턴의 선라이즈 밸리 드라이브에 있는 골즈짐에서 발생했다. 당시 31세였던 최형준씨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동하던 중 하씨가 쏜 총에 상체를 여러 차례 맞았다. 최씨는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다.
경찰 조사 결과 하씨와 최씨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하씨가 최씨에게 다가가 조준 자세를 취한 뒤 총격을 가한 것으로 보고 사건을 표적 공격으로 규정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이나 구체적인 범행 동기는 공개되지 않았다.
사건 당시 헬스장에 있던 목격자들은 갑작스러운 총성으로 내부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증언했다. 한 목격자는 운동을 마치려던 순간 큰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한 남성이 쓰러진 피해자 위에서 총을 쏘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목격자는 총성이 최소 6차례 이상 들렸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하씨는 총격 직후 헬스장을 빠져나가 달아났으나 사건 발생 약 8시간 만에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이후 2급 살인과 중범죄 과정에서 총기를 사용한 혐의로 기소됐으며,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종신형에 처할 가능성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자 최씨는 사건 당시 어린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최씨의 아내는 남편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줄이지 않기 위해 점심시간에 운동하러 갔다가 변을 당했다고 지역 방송에 밝혔다. 갑작스러운 총격으로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연이 알려지면서 지역사회의 안타까움도 커졌다.
이번 법정 결정에는 최씨의 유가족도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의 형은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심신상실을 이유로 살인에 대한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 결과가 가족에게는 불공정하게 느껴진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족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됐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 만큼, 법률적 무죄와 피해 가족이 느끼는 정의 사이에 큰 간극이 드러난 것이다.
정신이상에 따른 무죄 제도는 범행 당시 중대한 정신질환으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행동을 법에 맞게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사람에게 일반 범죄자와 같은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원칙에 근거한다.
그러나 강력범죄 피해자와 유족 입장에서는 생명을 빼앗은 행위에 대해 징역형이 선고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반복적으로 논란이 발생한다.
특히 ‘무죄’라는 표현이 피고인의 즉각적인 석방을 뜻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사회적 반발이 커지기도 한다. 실제로 버지니아주에서는 정신이상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법원이 정신의료시설 수용을 명령한다. 이후에도 정신상태와 위험성에 대한 정기적인 사법 심사가 이뤄지며, 조건부 석방 규정을 위반하거나 위험성이 높아지면 다시 시설에 수용될 수 있다.
법원은 앞으로 하씨의 정신질환 정도와 재발 가능성, 치료 반응, 약물 복용 여부, 감독 없이 사회에 복귀할 경우의 위험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피해자 유족에게 관련 심리와 석방 신청 절차를 통보할 수 있도록 한 버지니아주법에 따라 향후 치료와 석방 여부를 둘러싼 법적 절차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 사건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치료 필요성과 강력범죄 피해자의 권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라는 어려운 과제를 다시 제기했다. 피고인의 형사책임 능력을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과 별개로, 유족에게 충분한 설명과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공공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엄격한 사후 관리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씨의 법적 운명은 아직 최종 확정되지 않았다. 오는 9월 17일 법원이 장기 입원 치료를 명령할지, 일정한 조건 아래 사회 복귀를 허용할지에 따라 이번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다시 커질 것으로 보인다. <뉴스/사진 밴쿠버 교차로>